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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홍범도 봉오동 전투와 김좌진 청산리 전투

by 인문학엄마 2023.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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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홍범도

봉오동 전투 리더 홍범도

홍범도는 1868년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아홉 살에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머슴, 군인, 제지 공장 등에서 일했습니다. 

뛰어난 총 실력으로 호랑이 사냥꾼이 됐는데,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사건 등을 겪으며 일제에 맞서기로 결심했습니다. 홍범도가 조직한'산포수 의병 부대'는 총을 잘 쏘고 산을 잘 타기로 유명했는데 60번의 전투 중 한 번도 진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홍범도의 별명이 '하늘을 나는 장군',  '백두산호랑이'라고 불릴 정도였다고 하네요.

1908년 일본의 눈을 피해연해주로 건너가 무장 독립운동을 이어갔습니다. 1919년 3.1 운동으로 일본의 감시가 더욱 심해지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해외로 망명했고, 만주로 건너간 사람들은 한인 마을을 이루었습니다. 

독립군 양성 기관인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 등 무장 항쟁을 독립운동의 주요 방법으로 삼았습니다.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외에도 북로군정서군, 서로군정서군, 대한독립단, 광복군 사령부가 조직되는 등 1920년 당시 만주와 연해주에만 50여 개의 독립군단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형을 이용한 전술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군들이 활발한 국내 진공 작전을 펼치자 일본은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나섰습니다. 1920년 6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관 안무의 국민회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가 연합해 봉오동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되었습니다. 봉오동은 좁고 긴 골짜기를 지나면 분지가 나오는 특이한 지형으로, 독립군 부대는 이를 활용한 전술을 사용하였습니다. 선발대가 후퇴하는 척하면서 일본군을 산으로 막힌 포위망으로 유인해 매복한 독립군 700여 명이 일제히 사격을 퍼부었고 일본군 157명이 죽고 300여 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그에 반해 독립군은 사상자가 6명에 그쳤다고 합니다.

봉오동 전투는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벌인 전쟁 중 첫 승리였습니다. 그래서 이어진 전투에도 자신감으로 승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홍범도는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 후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준비하다가 소련의 한인 강제 이주정책으로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해야 했고, 그곳에서 극장 문지기로 일하다 1943년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김좌진

 

청산리 전투 리더 김좌진

1889년 충남 홍성의 부유한 명문가에서 태어난 김좌진은 1907년 고향에 호명학교를 세우고 활발한 애국 계몽 운동을 벌입니다. 

1910년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자 무장 항쟁으로 나라를 되찾기로 마음먹게 됩니다. 김좌진은 1911년 독립군 사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다가 투옥됩니다 1918년 일본의 감시를 피해 만주로 건너간 뒤 북로군정서 총사령관이 되어 본격적으로 무장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됩니다.

1920년 봉오동 전투에서 패한 일본은 마적단 400여 명에게 중국 지린성 훈춘에 있는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도록 합니다. 이 일을 독립군이 한 일로 몰아붙여 한인들을 대량 학살하는 '훈춘 사건'을 일으킵니다. 일본의 압력을 받은 중국군의 요구에 따라 독립군은 근거지를 국내 진공 작전에 유리한 백두산 일대로 정합니다.

청산리에서 백전백승

백두산으로 향하던 독립군을 추격하던 일본군을 청산리 일대에서 맞닥뜨리고 되고, 1920년대 10월 21 ~ 26일까지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의 독립군 연합 부대가 10여 차례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는데, 이 전투를 통틀어 청산리 전투라고 합니다. 

첫 전투는 백운평 전투로, 김좌진 부대는 폭이 좁고 가파른 절벽으로 된 지형을 활용해 전투를 벌였습니다. 독립군이 매복해 있다가 일본군이 가까이 왔을 때 일제히 사격했고 완전히 포위된 일본군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이어진 완루구, 천수평, 어랑촌 전투에서도 백전백승했습니다. 일본군은 전사자만 약 1,200여 명이었습니다.

청산리 전투는 일본군에 맞섰던 최대 전투이자 최대 승리였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은 이에 앙심을 품고 '간도 참변'을 벌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한국인 3,700여 명이 죽고 한인 마을이 초토화가 됩니다.

김좌진 장군은 청산리 전투 이후 신민부를 만들고 독립군 양성에 전념하면서 국내로 밀사와 군대를 보내는 등 나라를 되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1930년 사상의 갈등으로 한 청년의 총에 맞아 42세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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