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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안중근 의사의 생애

by 인문학엄마 2023.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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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하면 하얼빈 의거로 많이 알려졌지만 사실 안중근 의사는 그 외에도 아주 많은 일들을 했는데요.  대한의 영웅 안중근 의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생애

안중근의 어린 시절

출생과 집안

안중근은 1879년 9월 황해도 해주에서 아버지 안태훈과 어머지 조마리아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태어날 때 등에 점이 7개가 있어 응칠이라고 불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안중근은 할아버지가 곡식 장사로 큰돈을 벌어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고 아버지 안태훈은 급진 개화파가 선발한 일본 유학생에 들 정도로 일찍부터 개화사상을 받아들인 인물이라고 합니다. 후에 안중근을 천주교와 개화사상으로 이끈 사람도 아버지였습니다.

안중근 소년 시절

1894년 일어난 동학 농민 운동은 모든 사람이 존중받는 세상을 만들고 외세로부터 나라를 구하자는 취지였지만 가짜 동학군이 기승을 부리면서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이 이를 막기 위해 군대를 꾸렸고 이때 안중근도 16세의 나이로 아버지와 함께 가짜 동학군을 진압했습니다. 안중근 어릴 때부터 말타기와 사냥을 잘했고 명사수였다고 합니다. 

아버지 안태훈과 어머니 조마리아

안중근의 국내 활동

을사조약과 애국 계몽 운동

러일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일본은 1905년에 우리나라와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에 따라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으로 와서 친일 단체를 조직해 우리 민족을 분열시키고 문화유산을 일본으로 빼돌리는 등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드는 데 앞장섰습니다.
신문과 잡지 등을 꾸준히 읽어 세계정세에 밝았던 안중근은 나라를 구할 방법으로 교육을 우선시했습니다. 그래서 1906년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자신의 재산으로 삼흥학교를 세우고, 돈의 학교를 사들여 교장으로 취임했습니다.  또한 군사 훈련을 교육 과목에 포함해 총 다루는 법 등을 가르치며 일본에 맞설 수 있는 인재를 기르려고 했습니다.

국채 보상 운동

일본은 우리나라를 근대화시키겠다는 구실로 큰돈을 빌려주고 갚을 것을 요구했는데, 이것은 우리를 빚으로 식민지화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1907년 전국적으로 일본에 진 빚을 갚자는 국채 보상 운동이 일어납니다. 이때 안중근은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을 맡으며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로 돌아갑니다.

해외에서 벌인 무장 투쟁과 의거

정미 7 조약과 독립운동

1907년 황제 고종이 헤이그 특사 사건의 책임을 지고 강제 퇴위를 당한 뒤 정미 7 조약을 맺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군대해산 되고 사법권을 빼앗기게 됩니다.  이에 따라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안중근은  노선을 바꾸어 독립 전쟁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데 가담하였습니다. 매국노 척결을 주장하던 그는 의병대를 찾아다녔다. 그 뒤 황해도 의병대의 한 사람으로 일본군과 싸우다가 자신이 직접 국외에서 의병부대를 창설하기 위해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서 계동청년회(啓東靑年會)에 가입하고, 곧 계동청년회의 임시사찰에 선출되었습니다.
1907년 연해주(沿海州)로 가서 의병운동에 참가하였다. 이듬해 1908년 7월 전제덕(全齊德)의 휘하에서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 겸 특파독립대장(特派獨立大將) 및 아령지구(俄領地區) 사령관의 자격으로 엄인섭(嚴仁燮)과 함께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공격하여 전멸시켰습니다. 그 뒤 본격적인 국내 진공작전을 계획, 감행하여 함경북도 경흥군과 신아산 부근의 야산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전과를 올렸으나, 얼마 후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처참하게 패배했습니다. 이때 기습공격을 받은 이유는 다른 의병대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안중근 혼자의 뜻으로 전투에서 사로잡은 일본군 포로를 국제공법에 의거해서 석방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해서 많은 지탄을 받습니다. 이 일로 의병의 신임을 잃은 그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새로이 의병을 다시 일으키려고 했으나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 부대는 곧 해체되었습니다.
1909년 초, 안중근은 뜻이 같은 동지 11인과 함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고 의병으로 재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안중근은 이때 왼쪽 손의 약손가락(넷째 손가락) 한 마디를 끊어 혈서로 결의를 다졌다. 안중근의 수인(手印)은 이때부터 찍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얼빈역에서 울려 퍼진 총소리

저격 직전의 이토 히로부미(왼쪽에서 두 번째)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된다는 소식에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자원했고 10월 21일에 대동공보사 기자 이강(李剛)의 지원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안중근은 우덕순과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에 도착했습니다.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하얼빈에 도착했고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대신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열차 안에서 회담을 가진 후 9시 30분경 러시아 군대의 사열을 받기 위해 하차하였습니다. 안중근은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가슴과 옆구리, 복부를 명중시켰고 이외에도, 일곱 발의 저격 총알 중, 나머지 네 발 중 세 발은 각각 옆에 있던 수행비서관 모리 타이지로우(森泰二郞), 하얼빈 주재 일본 제국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남만주 철도의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우(田中淸次郞)에게 총격하였습니다.
총격 직후, 안중근은 가슴 안에 있던 태극기를 높이 들어 올리며 에스페란토어로 “ 코레아 우라! ”이라고 3번 크게 외쳤습니다. 이 외침은 대한 독립만세라는 뜻이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피격당한 직후 열차로 옮겨졌으나 사망하였습니다. 

재판장에서 선 안중근

안중근은 곧바로 러시아군에 체포되었고 1차 조사 이후 하얼빈 일본총영사관으로 넘겨졌습니다. ★최재형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 장소를 하얼빈으로 정해, 일본이 아닌 러시아 제국 법정에서 재판을 받도록 조치하고, 변호사인 미하일로프 주필을 안중근의 변호인으로 준비했으나 안중근이 일본 제국 정부에 넘겨져 관동주 뤼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한편 법관양성소 출신 변호사 안병찬(安秉瓚)이 안중근을 위해 무료 변론을 했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를 묻는 말에 다음과 같이 답했습니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15가지 이유.
첫 번째,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두 번째, 1905년 11월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 죄
세 번째, 1907년 정미 7 조약을 강제로 맺게 한 죄
네 번째,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다섯 번째, 군대를 해산시킨 죄
여섯 번째,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 죄
일곱 번째, 한국인의 권리를 박탈한 죄
여덟 번째, 한국의 교과서를 불태운 죄
아홉 번째, 한국인들을 신문에 기여하지 못하게 한 죄
열 번째, (제일은행) 은행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열한 번째, 한국이 300만 영국 파운드의 빚을 지게 한 죄
열두 번째,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열세 번째,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정책을 호도한 죄
열네 번째, 일본천황의 아버지인 고메이 천황을 죽인 죄
열다섯 번째, 일본과 세계를 속인 죄 

뤼순 감옥에서 안중근

안중근의 죽음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받은 안중근은 감옥에서 자서전 <안응칠 역사>와 <동화평화론>을 집필하며 죽음 앞에서 의연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는 <동화평화론> 완성을 위해 사형 집행일을 미뤄 달라고 부탁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결국 1910년 3월 26일 처형되었습니다. 그의 나이 32세로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유해는 오늘날 현재까지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같이 거사한 우덕순은 징역 3년, 조도선과 유동하는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습니다. 
★ 안중근의 어머니이자 독립운동가 조마리아
안중근의 어머지 조마리아는 국채 보상이 일어났을 때 기꺼이 가지고 있던 패물들을 내놓았고, 아들 안중근이 사형선고를 받자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니 네가 나라를 위해 이른즉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라고 말할 정도로 투철한 독립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뜻에 따라 항소를 포기한 안중근 의사는 사형이 집행되기 전인 1910년 3월 9~10일경, 어머니가 준비한 하얀 명주천으로 지은 수의를 가져온 두 동생 안정근과 안공근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겼습니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 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르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어머지 조마리아는 안중근이 죽은 뒤에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후원하는 등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쳤습니다.

★ 독립운동가 최재형
최재형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연해주로 이주해 17세 때부터 장사로 큰돈을 벌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업체에 우리나라 사람을 고용해 경제활성화에 이바지했고, 을사조약 소식을 듣고 전 재산을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는 데 썼습니다. 특히 최재형은 안중근이 독립운동을 펼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그를 도왔고, 안중근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가족을 돌봐 주었습니다.  

2023.8.14일 최재형 선생, 순국 103년만에 부인 최 엘레나 여사 유해 국내 봉환해 본래 최재형 선생의 묘가 있던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108번 자리에 합장했습니다.

안중근의사 하면 가슴이 먹먹해져 옵니다. 우리 조상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평범한 자유를 누리지 못했고 가슴에 한을 맺고 살았을 것입니다. 안중근의사를 비롯하여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의 편안한 영면을 기원합니다. 또한 독립운동가 자손들의 영원한 행복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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