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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김만중 < 사씨남정기>

by 인문학엄마 2023.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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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씨남정기는 숙종이 인현 왕후를 폐위하고 간사한 장희빈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것에 반대하다가 남해로 귀양 가서 왕의 흐려진 마음을 깨우치고자 지은 작품입니다.

사씨 남정기

 

사씨남정기

 줄거리

유한림(한림 유연수)은 사씨 처녀를 아내(사 씨 부인)로 삼지만 오랫동안 자식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자 사부인은 남편에게 청해서 교 씨를 첩으로 맞아들이도록 하지요. 하지만 교 씨가 아들 장주를 낳은 뒤에 곧 사 씨도 아들 인아를 낳자, 교 씨는 자신의 지위에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이에 교 씨는 유 한림에게 사 씨를 여러 차례 모함하지만 통하지 않자, 동청· 냉전과 모의하여 사 씨에게 바람을 피웠다는 누명까지 씌웁니다. 그것도 모자라자 동청과 설매는 교 씨의 아들 장주를 죽이고는 사 부인의 짓이라 모함합니다. 결국 유 한림사 부인을 쫓아내고, 사 씨는 이리저리 헤매며 큰 시련을 겪습니다.

그 후 유 한림은 조정에서 승상으로 있던 엄승과의 갈등으로 관직에서 물러나는데, 집에 머무는 동안 점차 사 부인의 죄가 확실치 않음을 깨닫습니다. 그러자 동청은 승상 엄승에게 모함하여 유 한림을 유배 보내고, 교 씨는 자신의 정부(情夫)인 동청을 따라갑니다. 유배에서 은사로 풀려난 유한림은 설매를 만나 자초지종을 들어 알게 되고, 사 씨를 찾아 헤매어 결국 만나게 됩니다.

그 후 왕이 엄숭 일파를 내치고 유한림 일파를 다시 등용하면서 동청은 처형됩니다. 그러자 교 씨는 냉진을 따라 떠나지요. 하지만 유한림은 교 씨를 잡아들여, 다시 정실부인이 된 사 부인 앞에서 문초한 뒤 처형합니다. 유 한림과 사 부인은 백년해로합니다.

 작품 해설 

<사씨남정기> 창작의 역사적 배경

이 소설은 조선 제19대 왕 숙종 때 창작되었습니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숙종은 후궁 장 씨(장희빈)의 미모와 간계 때문에 1689년에 인현 왕후를 폐위하여 대궐 밖으로 내쫓고 장 씨를 왕후로 삼지요. 그러나 1694년에는 인현 왕후 폐위가 잘못된 일임을 깨닫고 인현 왕후를 복위시키는 동시에 장 씨를 희빈으로 강등시킵니다. 그리고 1701년 인현 왕후가 죽은 뒤에, 장 희빈은 대궐 안에 신당을 차려 놓고 인현 왕후를 저주한 일이 발각되어 사약을 받고 죽습니다.

이 소설의 작가 서포김만중은 인현 왕후를 지지한 서인(西人) 출신의 관료로서 벼슬이 대제학, 대사헌에 이른 사람이지요. 그는 인현 왕후가 폐위되고 장희빈이 중전이 된 때에 이 소설을 썼습니다. 숙종이 장희빈의 간계를 알아차리기 바라면서 유배지에서 쓴 거죠. 즉, 그는 숙종을 유한림에 빗대고, 인현 왕후와 후궁 장 씨를 각각 사 부인과 교 씨에 빗대었습니다.

후궁 장 씨가 모략과 간사한 피로 숙종을 속여 인현 왕후를 쫓아냈다고 고발하는 한편, 숙종이 이런 사실을 깨달아 인현 왕후를 복위시키고 장 씨를 처벌하기 바란 것이죠. 결국 그의 소원대로 인현 왕후는 1694년에 복위되고, 후궁 장 씨는 그 뒤에 사약까지 받지만, 김만중은 이런 결말을 보지 못하고 1692 년 유배지에서 죽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사건은 두 여인에 대한 숙종의 애증이라는 단순한 배경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숙종의 집권 초기에는 서인과 남인(남쪽사람) 사이의 당쟁이 치열했습니다. 1681년에 즉위한 인현 왕후는 서인의 중요한 권력 기반이었지만 자식을 낳지 못했습니다. 숙종은 후궁 장 씨의 아들인 왕자 윤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는데, 서인은 이에 강력히 저항하다가

결국 1689년에 사약을 받거나 유배 가거나 관직에서 쫓겨나거나 하여 세력을 잃습니다. 인현 왕후가 폐위된 것이 바로 이때이고, 서인이 몰락한 뒤에는 남인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지요. 그러다 1694년에 서인은 인현 왕후복위 운동을 벌이고, 숙종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남인은 물러나게 됩니다. 그 뒤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지만, 어쨌든 조선 시대가 끝날 때까지 인 출신(노론)이 권력을 쥐게 됩니다. 고종과 대원군의 시대까지 말이죠.

과연 장희빈이 교 씨처럼 악독하고 간사한 사람이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남아 있는 역사적 기록은 모두 서인과 인현 왕후의 측근, 후계들이 남긴 것이니까요.

이 작품은 지금의 관점에서 볼 때 비판할 곳이 적지 않습니다. 조선 사대부 집안의 처첩 갈등(정실 부인과 첩 사이의 갈등)은 일부다처제의 모순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일부다처제는 유교적인 가부장제 윤리로써 정당화되었고요. 남자는 자기 마음대로 여러 여자를 거느리면서 여자에게만 정절을 요구했습니다. 사 부인이 다시 정실부인이 되고 교 씨는 처형되지만, 이 소설에서 모든 사건의 근본 원인인 유교적인 가부장제 윤리는 끝까지 비판받지 않습니다.

또 여기에 나타난 여성상도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작품 속의 여성은 수동적이거나 악독하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사 부인은 한없이 순진하고 나약하며 남편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교 씨는 한없이 사악하고 간사하게 표현됩니다. 남편에게 무조건 순종하는 순진하고 나약한 여성의 모습이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그려져 있다는 겁니다. 이것 또한 유교적 가부장제 윤리에 의하 것이고 이런 점들이 우리가 <사씨남정기>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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