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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핵무기 개발자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by 인문학엄마 2023.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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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오펜하이머 영화가 아주 핫하죠!! 오펜하이머에 대해서 궁금증도 생기고, 더 자세히 알고 싶어졌습니다. 

 

핵무기 개발자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천재 물리학자의 탄생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1904년 4월 22일에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독일계 유태인으로 17살 때에 미국으로 건너와서 직물 수입업으로 돈을 벌었던 전형적인 자수성가형의 인물이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에게 선물로 받은 광석 세트를 계기로 7살 때부터 결정 간의 상호작용에 관심을 가질 정도로 어린 시절에도 천재의 두각을 드러냈다. 그는 1925년 하버드대학교 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을 거쳐 독일 괴팅겐대학에 편입해 양자물리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1929년 미국으로 돌아와 캘리포니아 버클리대의 조교수로 임용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오펜하이머는 지적호기심이 넘쳐나 영어 외에도 총 7개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그의 관심사는 물리학뿐만 아니라 문학, 미술, 음악, 사회, 정치로도 뻗어나갔다.

오펜하이머는 학창 시절에 1년 반을 월반해서 18세의 나이로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했고, 화학을 전공했지만 문학, 프랑스어, 역사를 두루 공부했다. 그는 어학에 뛰어난 소질을 가지고 있어서 불어는 물론 독일어, 라틴어, 그리스어를 익혔고, 시와 동양 철학을 좋아했다. 그렇지만 그는 대학생 시절에 브리지먼(Percy Bridgman) 교수의 열역학 강의를 듣고 실험 물리학이라는 주제에 점점 더 깊게 빠져들었다. 오펜하이머는 6과목을 듣고 4과목을 청강하는 강행군을 한 끝에 3년 만에 하버드 대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학교에서는 언제나 1등을 놓치지 않는 그의 학업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그의 부모의 걱정은 다른 아이들과는 거의 함께 놀지 않는 그의 성격에 있었다. 성적은 뛰어나지만 운동신경은 거의 없다시피 하며 행동이 분명하지 못하고 무슨 일에 대해서든 곧 얼굴을 붉히며 혼자 있기를 좋아했다.

그저 보통의 평범한 천재 물리학자로 살던 오펜하이머는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가 집권하고,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삶이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초기 연구와 정치적 입장

대학을 졸업한 뒤에 오펜하이머는 브리지먼의 추천을 받아 영국 물리학의 산실인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캐번디시 연구소 대학원 과정에 진학했다. 당시 연구소의 소장은 원자핵을 발견해서 노벨상을 수상했던 실험 물리학자 러더퍼드(Ernst Rutherford)였다. 러더퍼드는 실험 물리학보다 이론 물리학에 소질이 있던 오펜하이머를 좋게 보지 않았고, 오펜하이머는 결국 러더퍼드 직전에 소장을 역임한 노학자 J. J. 톰슨(Joseph John Thomson) 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1930년대에 오펜하이머는 유럽에서 부상하던 파시즘에 반대하는 여러 사회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독일계 유태인 가문 출신이었고, 유태인을 탄압하고 학살하는 독일에는 아직 그의 친척들이 살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은 뒤에 사회운동을 하는 단체에 기부를 많이 했고,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를 지지하는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 무렵 오펜하이머는 캘리포니아 공산당에서 활동하는 진 태틀록(Jean Tatlock) 같은 여성을 알게 되어 그녀를 깊이 사귀기도 했다. 그는 공산당 당원은 아니었지만 그 활동에 동조하고 돈을 기부하는 동조자(fellow traveler)였다. 이 시절에 그는 역시 공산당 당원이자 급진 학생 운동가였던 캐서린 퓨닝 해리슨(Katherine Puening Harrison)을 만나서 결혼했고(1940), 1941년, 1944년에 두 자녀를 낳았다.

 오펜하이머가 결혼을 할 무렵에 물리학계의 최대 관심은 독일이 새롭게 발견된 핵분열과 연쇄반응을 이용해서 원자폭탄을 개발할 것인가라는 문제였다. 

미국 정부는 “맨해튼 엔지니어 지역(Manhattan Engineer District)”이라는 암호명을 가진 거대한 규모의 원자폭탄 프로젝트를 출범시켰다. 이 맨해튼 프로젝트의 총책임자는 국방성(펜타곤) 건물의 건축을 담당했던 그로브스 대령(이후 장군으로 승진)이었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크게 두 가지 부문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원자폭탄을 만드는 핵분열 물질을 추출하거나 만들어내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렇게 만들어진 핵분열 물질을 가지고 폭탄을 제조하는 것이었다. 핵분열 물질을 분리하는 일은 거대한 공장 규모의 실험실과 많은 노동 인력을 필요로 했으며, 모든 이들이 엄격한 비밀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물질을 가지고 폭탄을 제조하는 일은 뉴멕시코 주의 사막에 있는 로스앨러모스라는 작은 지역에 지어진 비밀 연구소에서 수행되었다. 오펜하이머는 1942년에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의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오펜하이머는 이 연구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연구 프로젝트의 세부사항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중요한 아이디어가 나오거나 중요한 토론이 이루어지는 순간에 항상 참석해서 과학자들을 독려하고 자극했다. 이런 리더십은 연구소에 항상 열정과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으며, 모든 사람에게 지금 자신이 가장 중요한 일에 참여하고 있다는 신념을 심어 주었다.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의 이론물리학 분과를 지휘하던 한스 베테는 “그가 없었다면, 로스앨러모스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하면서, 오펜하이머는 군림하거나 지배하려고 하는 대신에,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소통을 강조했다고 회상했다.

실험실 내의 모든 그룹 리더들은 함께 참여해서 기술적 문제들을 논의했고, 박사 이상의 과학자들은 주어진 문제에 대한 전문적인 콜로키엄에 자유롭게 참가할 수 있었다. 이런 참여의 분위기를 통해 과학자들은 실험실의 성공이 곧 자신의 성공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오펜하이머의 리더십

오펜하이머의 리더십이 가장 잘 드러났던 사건은 1944년에 일어났다. 당시 원자폭탄을 만드는 방법에는 방사능 물질의 일부를 총알처럼 쏘아서 다른 방사능 물질과 결합하는 포신결합(gun-assembly) 방식과 방사능 물질을 구형으로 배치시키고 이를 안쪽으로 폭파시켜서 결합시키는 내파(implosion) 방식 두 가지가 제시되었다. 과학자들은 내파 방식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고성능 폭약을 개발해야 하고 충격파(shock-wave)에 대해서 더 많은 이론적 작업을 축적해야 하기 때문에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하고, 포신결합 방식을 사용하기로 일찍이 합의했었다.

그런데 1944년에 로스앨러모스의 과학자들은 핸퍼드나 오크리지에서 얻어낸 플루토늄이 불안정해서 이에 포신결합 방식을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유일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우라늄-235였는데, 우라늄-235는 1945년 여름까지 폭탄 하나 정도를 만들 분량만이 확보될 수 있을 뿐이었다. 이 하나의 원폭은 실험에 사용되어야 했는데, 그러면 실전에서 쓸 수 있는 폭탄은 하나도 없는 셈이었다. 결과적으로 아직 모르는 것이 많은 내파 방법을 사용해야만 하는 절대적 필요성이 대두되었던 것이다. 이때 오펜하이머는 연구소를 내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목표를 중심으로 재조직했다.

기존의 연구가 아니라 고성능폭약과 충격파를 이해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이론 물리학자와 실험 물리학자들의 협업을 꾀해서 어려운 난제들을 하나씩 해결해 나갔다.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은 최선을 다해서 일했고, 이런 리더십 아래 결국 단기간에는 불가능하다고 알려졌던 플루토늄을 사용한 내파 폭탄 두 개를 만들었다. 로스앨러모스에서는 그와 협력했지만 나중에는 적대적인 관계가 된 에드워드 텔러(Edward Teller)는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오펜하이머가 자신이 봤던 모든 연구소 소장 중에 최고의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

 

1945년 7월에는 두 개의 플루토늄 폭탄과 한 개의 우라늄 폭탄이 제조되었다. 두 플루토늄 폭탄 중 하나가 7월 16일에 ‘트리니티(Trinity)’라는 암호명이 붙은 테스트에서 시범적으로 폭파되었다. 첫 원자폭탄이 터지는 것을 목격한 과학자들은 그 섬광이 “천 개의 태양보다도 밝다”라고 느낌을 전했다. 오펜하이머는 이 순간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945년 9월에 트리니티 테스트 지역을 다시 찾은 오펜하이머와 그로브스 장군. 폭탄을 설치한 철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아래에 약간의 철근만 남아 있다.

 

우린 이 세상이 예전과 같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소수는 울고 또 웃었지만, 대다수는 침묵했다. 힌두 경전인 『바가바드기타』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비슈누는 왕자에게 의무를 다하라고 설득하는 중에 자신의 위엄을 떨치기 위해 여러 팔을 펼쳐 보이며 이렇게 말한다. “이제 나는 세상의 파괴자, 죽음의 신이 되었다.” 나는 우리가 어떻든지 이것을 모두 생각했다고 본다. - 수소폭탄과 청문회

남은 두 발의 원자폭탄은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떨어졌고, 일본은 1945년 8월 15일에 항복했다. 그는 투하가 결정되기 직전에 열린 폭탄 투하를 결정하는 회의에서 인구가 많은 군사적 타깃에 폭탄을 투하하라는 결정을 승인했다. 그렇지만 폭탄이 투하되고 수많은 민간인이 살상된 뒤에 전쟁이 끝나자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결정에 대해서 깊이 후회했고, 바로 연구소 소장직을 사퇴했다. 오펜하이머는 나중에 “나는 폭탄을 만들고 트리니티 테스트를 한 것에 대해서는 미안한 마음이 없다. 그것은 제대로 된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을 우리가 사용한 방식에 대해서는 그것이 제대로 사용되었다고 느끼지 않는다.… 우리 정부는 세상과 일본에 대해서 폭탄이 의미하는 바를 더 통찰력 있고 분명하게 말해 주는 일을 해야 했었다.”라고 회고했다.

전쟁이 끝난 후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으면서 국가적 영웅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원자폭탄의 피해를 목격한 뒤 내면적으로 고통스러워했고, 이후 소비에트 연방과 미국 사이의 우호적인 공유를 통한 원자력의 국제적인 관리를 주장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이 운동은 미국 정부가 핵무기 독점을 위한 강경한 태도를 고수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대신 미국 정부는 원자폭탄을 포함한 원자 에너지를 미국의 군부가 아닌 민간 차원에서 통제해야 한다는 정책을 실시했고, 1947년에 이를 관장하는 원자력위원회(Atomic Energy Commission)를 신설한 뒤에 이 위원회의 과학 자문을 맡는 위원회(General Advisory Committee)의 의장에 오펜하이머를 임명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터지면서 미국의 수소폭탄의 개발 계획은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1951년에 수소폭탄 개발을 가로막았던 이론적인 난제가 해결되면서 수소폭탄 개발에는 박차가 가해졌고, 1952년에 미국은 첫 번째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하게 되었다.

1953년에 오펜하이머에 대해서 개인적인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보수주의자 스트라우스(Lewis Strauss)가 원자력위원회의 의장이 되고, 미국의 정치적 상황이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매카시 선풍으로 급격하게 우경화되면서, 상황은 오펜하이머에게 적대적인 방향으로 바뀌었다. 스트라우스는 오펜하이머를 면직시킨다는 조건을 달고 원자력위원회의 의장을 수락했을 정도로 오펜하이머를 불신하고 있었다.

1953년 말에 오펜하이머가 공산주의자라는 투고가 접수되었고, 스트라우스는 이를 계기로 오펜하이머의 비밀정보 사용허가(security clearance)를 취소하고, 오펜하이머가 청문회를 통해 이를 복구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오펜하이머는 청문회를 통해 자신의 결백과 충성심을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해서 이를 수락했는데, 스트라우스는 청문회 안보위원회의 위원을 오펜하이머에게 불리한 쪽으로 구성했고, 청문회에서 오펜하이머에게 질문을 던지는 사람으로 형사 사건의 검사를 많이 맡았던 롭(Roger Robb)을 채택했다.

청문회 안보위원회는 2:1로 오펜하이머의 비밀정보 사용허가를 취소해야 한다고 판결했고, 원자력위원회는 4:1로 이를 승인했다. 이후 오펜하이머는 비밀문서를 취급하는 모든 공직에서 사임했다.

공직에서 사임한 뒤에 오펜하이머는 주로 과학이 정치에 의해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 현대 사회에서 지식의 힘을 관리하는 방법에 대해서 강연을 했다. 그의 강연들은 책으로 묶여 출판되었다. 1963년에 미국 정부는 화해의 제스처로 오펜하이머에게 엔리코 페르미 상을 수여했다. 그러던 중 오펜하이머는 1965년에 식도암 진단을 받았고, 1967년 2월 18일에 6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촉망받는 과학자, 원자폭탄 연구소의 소장, 원자력위원회 자문위원회 의장, 모욕적인 청문회를 거친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글은 “과학이 전부는 아니지만, 과학은 정말 아름답다.”였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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